인구절벽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4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의 생산연령인구는 급감하기 시작해 2070년에는 현재의 약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주요 산업 현장에서는 이미 인력난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 우리나라의 핵심 산업들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 혁신에 주목하는 지금, 우리에게는 산업 특화형 인공지능, 즉 ‘버티컬 AI’라는 새로운 카드가 있다. Chat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범용성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각 산업의 특수성에 맞춘 고도로 전문화된 AI를 도입할 때다.
대한민국의 강점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그 성과가 두드러진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웨이퍼 검사에 AI 시스템을 도입하여 불량 검출 정확도를 크게 높였으며, 이는 글로벌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는 AI 기반 고로 운영 시스템으로 에너지 효율을 개선했고,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제조공정에 AI 품질관리를 도입하여 생산성 향상을 이뤄냈다. 이러한 스마트팩토리로의 전환은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제품 품질을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의료 분야에서도 AI 혁신이 가시화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고려대학교의료원, 강남세브란스병원, 한양대학교병원 등 5개 주요 병원이 응급실 AI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응급실 데이터베이스 구축, 치료 과정 최적화 기술 개발, 심정지, 심혈관 질환, 패혈증 등의 예측을 위한 임상결정지원시스템(CDSS)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의료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AI는 의료진의 효율적인 진료를 돕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 있다.
실버케어 분야에서도 AI는 고령화 시대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SK텔레콤의 AI 돌봄 서비스는 독거노인의 생활 패턴을 분석하여 응급상황에 대응하고 말벗 서비스를 제공하며, KT는 AI 웨어러블 기기로 노인성 질환을 조기 감지하는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65세 이상 인구가 2025년 20%를 넘어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상황에서, AI 기반 실버케어 시장은 2030년 168조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특히 요양보호사 등 돌봄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AI 기술은 부족한 인력을 보완하고 서비스 품질을 높이는 핵심 수단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권에서도 AI 도입이 활발하다. KB국민은행은 AI 이상거래탐지 시스템으로 금융사기 예방을 강화했고, 2024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키오스크형 ‘AI 뱅커’를 도입했다. 이 AI 뱅커는 실시간 대화형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가상 인간 기술을 활용하여 고객 서비스를 제공한다.
에너지와 물류 분야의 혁신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전력은 AI 전력수요 예측 시스템으로 전력 수급 안정성을 높였으며, 물류기업들은 AI 기반 물류 최적화로 배송 효율을 크게 개선했다. 이는 인력 부족 문제를 겪고 있는 물류 산업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고 있다.
버티컬 AI 도입은 기존 산업의 혁신적 가치 상승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6년까지 AI 도입으로 인한 국내 산업 전반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3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단순한 생산성 향상을 넘어서는 산업 구조의 근본적 혁신을 의미한다.
이러한 혁신이 전 산업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했는데, 현재 국회에선 연내에 인공지능 기본법 통과를 앞두고 있다. 이 법은 AI 개발과 활용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안전성과 윤리성을 담보하면서도 혁신을 저해하지 않는 균형 잡힌 규제 체계를 제시할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이 많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산업별 특화 AI 개발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산업 경쟁력이 아직 건재할 때, 버티컬 AI를 통한 혁신을 서둘러야 한다. 인구감소라는 위기를 AI 기술력으로 극복하고, 나아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다.
인공지능 기본법 통과는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법이 통과되면 각 산업별로 구체적인 버티컬 AI 로드맵을 수립하고, 집중적인 투자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세계적 수준의 산업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AI라는 날개를 달면 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현철 한국인공지능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