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화된 패권 경쟁은 새로운 문명 전환기에 나타나는 필연적 충돌이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전쟁이 아닌, 산업자본주의에서 범용인공지능(AGI) 기반 지능경제로의 대전환기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이다.
최근 공개된 딥시크(DeepSeek)는 이 경쟁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 특히 추론용 R1 모델이 개인 개발자와 소규모 연구기관, 스타트업들도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공됐다. AI 기술의 진입 장벽이 크게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Open AI, 구글, 앤트로픽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독점적 AI 모델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자, 기술의 민주화를 통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마치 안드로이드를 통해 구글이 모바일 OS 시장의 패권을 장악했던 것처럼, 중국은 개방형 AI 생태계에 기여함으로써 글로벌 AI 표준을 선점하고자 한다. 동시에 기술 공유의 주도자라는 명분도 취하고 있다.
딥시크 개발에 들어간 GPU 자원과 비용이 ‘획기적’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실제로 대규모 AI 모델 개발은 여전히 막대한 인프라와 투자가 필요하다. 중요한 점은 딥시크가 최신형 모델의 최고 성능을 겨냥하기보다, 쓸 만한 수준의 추론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한 데 있다. AI 생태계 내에서 진입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런 접근 방식은 소규모 연구기관, 스타트업, 개인 개발자 등에게 희소식이다. 기존 대형 빅테크 기업들이 독점해 온 최첨단 AI 모델에 준하는 기능을 이들도 활용할 문이 열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딥시크의 공개는 비용이나 자원 효율성 자체보다는 기술의 민주화와 오픈소스 생태계를 통한 경쟁 구도 변화를 유도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즉, 딥시크가 보여준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제한된 자원으로도 ‘실용적’ 수준의 추론 모델을 구현하는 가능성이 첫째다. 또 이를 기반으로 빅테크의 독점적 지위를 흔드는 생태계 구축의 트리거 역할이 둘째다. 이러한 전략적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AI 혁신에 동참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AI 기술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고 있다.
![딥시크의 출현으로 미·중 간 생성형 AI 경쟁도 가열되고 있다. 사진은 ChatGPT와 딥시크 이미지를 합성한 장면. [중앙포토]](https://cdn.m-joongang.com/news/photo/202502/400770_51705_2847.jpg)
‘AI 3대 강국’보다 ‘AGI 보유국’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AI 3대 강국 도약’이라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수사적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과 중국이 AGI 개발을 목표로 문명사적 패권을 다투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산업적 차원의 ‘AI 강국’을 얘기하고 있다. 이런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 ‘AGI 보유국’이라는 더 큰 도전에 나서야 할 때가 왔다.
AI 3대 강국이 현재의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것이라면, AGI 보유국은 미래 문명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과거 산업화 시대의 ‘따라잡기 전략’과 우주 개발의 ‘프런티어 도전’이 다른 것처럼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목표다.
AI와 AGI는 뭐가 다를까? 현재의 AI가 정해진 규칙 내에서 특정 작업을 수행하는 도구라면, AGI는 인간처럼 스스로 학습하고 추론하며 다양한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인공지능을 뜻한다. AI가 현재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도구라면, AGI는 문명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메타 기술에 비유할 수 있다.
지능과 데이터 통제 시대
왜 AGI 경쟁에 ‘문명사’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AGI는 근본적 생산 혁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전 경제학의 관점에서 경제 생산의 3요소는 토지·자본·노동을 일컫는다. 1차 산업혁명이 육체노동을 기계로 대체했다면, 로봇과 결합한 AGI는 인간의 지적 노동과 산업 현장을 대체하게 된다.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서는 근본적 변화의 서막이다. 노동이 AGI로 대체되면 자본과 노동의 분리가 가속화되고, 이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의 출현을 촉발하게 된다.
또, AGI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다.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에 따르면, 각 시대는 당대를 관통하는 고유한 권력 형태를 지닌다. 봉건시대의 권력이 토지 소유에 있었고, 산업시대의 권력이 자본과 생산수단의 소유에 있었다면, AGI시대의 권력은 지능과 데이터의 통제 위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AGI는 문명 패러다임의 전환점이다. 토인비의 문명론적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문명의 대전환은 항상 새로운 도전과 응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AGI는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 대한 메타 해결사다. 이전의 그 어떤 도구나 기술과도 다른 차원의 응전 수단이 된다.
따라서 대한민국도 AGI 개발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해야 한다. 그러자면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정부는 연구 인프라 및 온톨로지(ontology)형 데이터 플랫폼 구축에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배정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대형 빅테크 기업들이 독점해온 기술력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미래 AI 패권 경쟁에서 자주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한국이 AGI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명확해진다.
첫째, 국가 생존의 차원이다. 한국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과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2040년경 생산 가능 인구가 4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단순한 인구 감소가 아닌, 국가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한다. AGI는 이러한 노동력 감소를 상쇄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예를 들어, AGI 기반 로봇이 제조업·의료·돌봄 등 핵심 산업의 인력 부족을 해결하고, 더 나아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둘째, 산업 경쟁력의 차원이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자동차·조선 등이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다. AGI는 이들 산업의 혁신적 재구조화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AGI 기반 반도체 설계는 현재 수개월이 걸리는 칩 설계를 수일로 단축할 수 있으며, 자율주행차량의 핵심 두뇌 역할도 할 수 있다.
엔비디아 진영과 비(非)엔비디아 진영 이원화
셋째, 국제 질서의 차원이다. AGI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새로운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AGI 개발 경쟁이 치열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이 AGI를 보유하지 못한다면, 미·중 양국의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종속적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AGI를 보유한다면, 신냉전 시대에 독자적인 협상력과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AGI 개발은 한국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국제적 위상을 결정할 관건적 요소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런 기대를 거슬러 가고 있다. 각 요소가 맞물려 거듭되는 악순환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출산율 저하는 내수 시장 축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경제 활력 저하와 청년 실업을 부추긴다. 지역 소멸은 수도권 과밀화를 가속하고, 이는 다시 지역 경제에 주름살을 안긴다. 제조업 경쟁력 약화는 일자리 감소를 낳고, 이는 다시 사회 안전망 약화로 귀결된다.
AGI 개발 경쟁에서 한국이 안고 있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공지능을 단순 과학기술 영역으로 한정 짓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국가안보위원회(NSC) 산하에 인공지능 최고책임자를 두어 AI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중국 또한 국무원 직속으로 AI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시진핑 주석이 직접 AI 전략을 관장한다.
![국가인공지능위원회가 지난해 9월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출범식을 가졌다. [중앙포토]](https://cdn.m-joongang.com/news/photo/202502/400770_51706_2929.jpg)
반면, 한국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라는 단일 부처에서 인공지능을 소관하고 있다. 나아가 지난해 9월 출범한 국가인공지능위원회에는 위원장인 대통령이 현재 궐위 상태인 데다, 홈페이지는 2월 14일 현재까지도 ‘오픈 준비 중’이다. 부처별 칸막이 정책과 관료 이기주의, 예하 진흥원 및 관변단체 중심의 경직된 예산 집행 시스템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더 심화한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집행권을 가진 독립 부처가 시급하다. 예컨대 중앙정부에 인공지능부(Ministry of Artificial Intelligence)를 신설하는 건 어떨까. 인공지능은 단순한 기술이나 도구가 아닌,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한 메타 설루션이다.
기후 변화, 에너지, 의료, 교육, 국방 등 각 부처가 직면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인공지능이라는 상위 해법이 필수적이다. 인공지능부는 개별 부처의 일개 정책 영역이 아닌, 정부 전체의 메타 컨트롤타워로 기능하게 하자. 이를 위해 민간 최고 전문가를 수장으로 앉혀 과학기술, 교육, 국방, 산업 등 전 분야의 AI 정책을 총괄·조정케 해야 한다. 마치 금융위원회가 금융 정책의 컨트롤타워이자 범부처 조정기구인 것과 같이 인공지능 분야도 유사한 기능을 하는 부서가 절실한 상황이다. 대통령의 강력한 지원이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 중인 국가 AI 컴퓨팅 센터 구축(SPC 설립) 사업도 인공지능부로 이관해야 한다.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이하 AI 기본법)을 개정해 모든 부처와 산하기관이 다루던 인공지능 유관 정책과 사업을 인공지능부로 이관하는 후속 조치도 병행돼야 한다.
이와 함께 엔비디아 진영과 비(非)엔비디아 진영으로 컴퓨터 인프라 구축을 이원화(二元化)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면 한다. 예컨대 엔비디아 중심의 고성능 GPU 팜을 구축, 최소 5개 이상의 컨소시엄이 AGI 개발 경쟁을 하는 구조를 만든다. 각 컨소시엄에 과학기술 관련 대학의 참여를 필수화하면, AGI 개발 과정에서 축적되는 기술과 노하우가 학계에 전수되고 인재 양성도 용이해진다. 동시에 비(非)엔비디아 진영을 위한 신경망처리장치(NPU) 팜을 글로벌 테스트베드로 구축하는 방식이 있다. 브로드밴드, 퀄컴, 구글, AMD, 인텔 등 다양한 기업들의 AI 가속기를 테스트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차세대 AI 칩의 검증 및 성능 평가 플랫폼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이런 제안이 가능한 건, 우리는 이미 상당한 자산 보유국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첨단 기술력, 세계적 수준의 IT 인프라, 그리고 한류로 대표되는 독보적 문화 영향력이라는 차별화된 가치를 보장한다. 이들 국가적 자산을 AGI 개발이라는 단일 목표로 결집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어려움을 딛고 선진국으로 도약했던 것처럼, 새로운 문명을 설계하는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2024년 5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인공지능 컨퍼런스 현장. [사진 한국인공지능협회]](https://cdn.m-joongang.com/news/photo/202502/400770_51708_3252.jpg)
대통령의 역사적 사명은 이것
한국에 AGI 개발은 선택이 아닌 생존과 미래 번영의 문제다. 인구 절벽, 제조업 위기, 사회 양극화 등 기존의 해결 방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AGI는 이러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이며,핵무기가 가져다주는 비대칭 전력을 넘어선 문명사적 도약의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AGI 개발은 단순한 이상(理想)이나 기술 경쟁 이상의 그 무엇이다. AGI 개발은 인류 문명의 다음 단계를 결정짓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과거 산업화시대의 ‘추격형 전략’이 아닌, AGI시대를 향한 ‘선도형 전략’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기존의 ‘AI 3대 강국’이라는 제한된 목표를 넘어 문명사적 도전에 나서고, AGI 보유국으로 도약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 대통령은 이것을 반드시 실현해야만 하는 역사적인 사명 앞에 서있다고 하겠다. 우리 국민도 이념적 허상에서 벗어나 진짜 미래를 같이 창의하는 주체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다.
김현철 1984년생. 국내 AI 관련 기업 1000여 개를 회원사로 둔 사단법인 한국인공지능협회 회장이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연구했다. 머신러닝 기반 추천 알고리즘 개발 회사를 운영하다 2016년 한국인공지능협회를 만들고, 2019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