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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부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AI)이다.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한국 경제를 긍정적으로 반전시키고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AI 산업과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것인가? 이 중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기술 트렌드를 정확히 읽고,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냉철하게 분석해 최적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 글은 AI 기술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AI 발전 5단계 종합 분석 프레임워크’를 나침반으로 삼고자 한다. AI의 지능은 1단계 인식형(분류), 2단계 생성형(표현), 3단계 에이전트형(디지털 실행), 4단계 피지컬형(물리적 행동), 5단계 시스템형(최적화)으로 진화한다. 프레임워크는 이렇게 AI의 진화 단계를 5개의 뚜렷한 경로로 제시하고 각 단계가 기술, 산업, 사회에 미치는 연쇄적 파급효과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AI의 진화를 기술 자체에만 국한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하는 후방 산업(인프라), AI 기술의 핵심인 기준 산업(모델), 그리고 AI가 사회에 적용되는 전방 산업(영향)의 세 가지 층위에서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현재의 생성형 AI(2단계) 경쟁에서는 구조적 약점으로 인해 고전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단계인 에이전트 AI(3단계)에서 모바일 앱 혁명 이상의 거대한 시장 기회가 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반을 활용해 피지컬 AI(4단계) 시대의 글로벌 리더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를 품고 있다.

현재 우리는 2단계 ‘생성형 AI’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단계의 경쟁력은 후방 산업의 ‘초고성능 학습 칩(GPU)’과 기준 산업의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이 분야에서 뚜렷한 구조적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글로벌 AI 지수에서 민간 투자 부문은 18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고, 이는 대규모 모델 개발에 필수적인 GPU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이 AI 관련 상장기업 수와 기업당 평균 투자 규모에서 모두 세계 4위를 기록하며 활성화된 창업 생태계를 보여주는 것과 대조적이다. 특허 수는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피인용지수는 선진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글로벌 기업과의 막대한 연봉 격차와 경직된 연구 환경으로 인해 우리의 최고급 인재들은 해외로 유출(OECD 38개국 중 35위)되고 있다. ‘투자 부족 → 인프라 부족 → 질 낮은 연구 → 인재 유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는 생성형 AI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힘을 쓰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하지만 생성형 AI 경쟁에서의 부진이 곧 AI 시대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 단계인 3단계 ‘에이전트 AI’에서 거대한 반전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에이전트 AI는 사용자 지시를 받아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웹 검색, 예약, 프로그래밍과 같은 다양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복잡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완수하는 ‘디지털 노동자’다. 이는 AI가 단순히 정보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행위’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단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 기업들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거대 시장이 열리고 있다. 이는 과거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앱스토어’라는 생태계가 폭발하며 수많은 앱 개발 스타트업이 탄생했던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 잠재력은 훨씬 더 크다.

여행, 금융, 의료, 법률 등 각 전문 분야에 특화된 AI 에이전트를 개발하는 스타트업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에이전트 경제(Agent Economy)’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관련 시장은 연평균 42.5%라는 폭발적인 성장률이 예고되고 가트너, 맥킨지 등 세계 기관들이 AI 에이전트를 차세대 AI 혁명의 주역으로 지목하고 있다.

우리는 3단계 ‘에이전트 경제’의 도래가 전략적 기회임을 포착하고 정책적 역량을 총집중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몇몇 기업을 지원하는 차원을 넘어 산업 구조와 일하는 방식 자체를 혁신하는 공격적인 청사진을 요구한다.

첫째, 에이전트 AI 시대는 국산 NPU(신경망 처리장치)를 키울 절호의 기회다. 수많은 AI 에이전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환경은 LLM 학습에 쓰이는 GPU보다 실제  서비스를 실행하는 ‘추론’ 연산에 최적화된 반도체의 폭발적인 수요를 일으킨다. 정부는 추론 칩 개발 R&D 지원을 넘어, 국산 NPU를 탑재한 AI 서비스에 대한 공공 구매 및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등 과감한 초기 시장 창출 정책을 펼쳐야 한다.

둘째, AI 에이전트는 조직의 HR 구조와 일하는 방식의 전면적인 재탄생을 요구한다. AI가 ‘디지털 노동자’로서 정형화된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 인간의 역할은 AI를 관리하고 창의적인 가치를 더하는 방향으로 재정의된다. 이는 기존의 직무 체계와 성과 평가 시스템의 완전한 개편을 의미한다. 정부는 기업들이 기존 인력을 재교육하기 위한 ‘AI 기반 OJT(On-the-Job Training)’ 프로그램을 도입하도록 유도하고, 관련 교육 커리큘럼 개발을 지원해야 한다.

셋째, 산업 혁신을 위해 AI 중심의 창업을 폭발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 이는 모바일 혁명기, 수많은 앱 개발자들이 탄생했던 것 이상의 파급력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인공지능 중심의 창업 폭발은 AI가 신입사원의 업무를 대체해 일자리 경험을 쌓기 힘든 주니어들에게는 오히려 ‘압축 성장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참신한 혁신성에 의해서 기존 산업이 빠르게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제조 강국인 한국에는 하나의 희망이 더 있다. 바로 4단계 ‘피지컬 AI’ 시대의 도래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로봇 공학을 위한 Chat GPT의 순간”이라고 표현했듯, 피지컬 AI는 제조, 물류, 건설 등 모든 물리적 산업을 혁신할 거대한 물결이다. 이미 글로벌 기업들은 이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테슬라는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Optimus)’를 자사 생산 라인에 투입하기 위해 개발 중이며,  BMW는 미국 스타트업 피겨 AI와 손잡고 ‘피겨 02(Figure 02)’ 로봇을 생산 공정에서 테스트하고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 역시 물류창고에 어질리티 로보틱스의 ‘디짓(Digit)’을 도입해 테스트 중이다.

4단계 피지컬 AI 시대의 후방 산업은 로봇과 자율주행차에 탑재될 온디바이스 추론 칩과 고밀도 전고체 배터리를 요구한다. 전방 산업의 핵심 이슈 역시 저작권 논쟁에서 자율 시스템의 법적 책임과 윤리(로봇법)로 이동한다. 이는 대한민국과 우리 기업에 절호의 기회다. 우리는 반도체, 자동차, 산업로봇, 배터리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피지컬 AI를 구현하고 상용화할 완벽한 하드웨어 플랫폼이자 테스트베드를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소프트웨어 역량의 열세를 하드웨어와 제조업의 압도적인 강점으로 상쇄하고, AI 경쟁의 판도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전략적 변곡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먼저, 잠재력을 지닌 3단계 ‘에이전트 경제’ 생태계 조성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거대 AI 모델을 활용해 금융, 법률, 의료 등 특정 분야에 특화된 혁신적인 에이전트를 마음껏 개발할 수 있도록 각 산업과 서비스별 API와 특화 데이터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 자율적 행위의 책임 소재 등 규제 불확실성을 해소할 ‘AI 에이전트 규제 샌드박스’를 선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국가 R&D와 투자의 무게중심을 4단계 ‘피지컬 AI’ 분야로 과감히 이동시켜야 한다. 로보틱스, 스마트 팩토리, 자율주행 등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제조업 강점을 AI와 융합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열세를 하드웨어의 강점으로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다.

셋째, 데이터 정책의 패러다임을 단순 개방에서 ‘전략적 자산화’로 전환해야 한다. 특히 에이전트 AI와 피지컬 AI의 성능 검증에 필수적인 고품질의 산업 데이터댐과 시뮬레이션 테스트베드를 국가 주도로 구축하고, 기업들이 안전하게 AI 모델을 실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공공데이터는 기업이 실제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도록 품질 관리와 데이터 간 연계 활용성을 높여야 한다. 동시에 기존의 ‘마이데이터(My Data)’ 제도를 전면적으로 확대해 국민의 데이터 주권을 보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혁신적인 개인 맞춤형 에이전트 서비스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

넷째, 심각한 인재 유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일본이 성공적으로 시행 중인 ‘특별고도 인재제도(J-Skip)’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다.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보상 체계와 자율적 연구 환경을 보장해 떠난 인재가 돌아오고 세계의 인재가 모이는 ‘AI 인재 허브’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LLM 개발 인력뿐만 아니라, 특정 산업 지식을 갖춘 ‘AI 에이전트 기획·개발자’와 하드웨어·소재·기계공학 지식을 겸비한 ‘피지컬 AI 융합 인재’ 양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규제는 혁신의 걸림돌이 아니라 신뢰의 토양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AI 발전 단계에 맞춰 규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에이전트 AI(3단계) 시대에는 보안이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AI의 법적 책임 소재와 알고리즘 투명성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피지컬 AI(4단계) 시대를 위해서는 의료, 국방, 자율주행차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고위험 분야에 대해 EU의 ‘AI Act’와 같이 엄격한 안전성 및 책임 규제를 적용해 사회적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반면, 그 외 대부분의 저·중위험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의 ‘AI 행정명령’처럼 네거티브 규제와 규제 샌드박스를 대폭 확대해 기업이 혁신의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운용의 묘가 필요하다.

특히 인공지능 발전에 따른 안보는 경제적 계산을 넘어선다. AI는 이제 국가 안보의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안보가 군사력과 영토에 기반했다면, 미래의 안보는 AI 기술력에 의해 좌우된다. AI의 진화는 정보전과 자율  사이 버전(3단계)을 거쳐 물리적 전장에서의 자율무기체계(4단계), 나아가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관리하는 글로벌 거버넌스(5단계) 경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흐름에서 AI 기술을 외부에 의존하는 것은 국가의 운명을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흔들림 없는 ‘내부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다. AI의 두뇌(반도체·모델)부터 손발(로봇·제조)까지, 핵심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고, 실행할 수 있는 자생적인 산업 생태계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세계와 대등하게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강력한 내부 역량만이 성공적인 AI 도입이 가져올 12% 이상의 GDP 성장 잠재력을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일자리 대체나 불평등 심화와 같은 피할 수 없는 파도를 우리 주도로 넘어설 힘을 줄 것이다.